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파스샹달 전투 (문단 편집) == 전투에 대한 의문 == > '''제3차 이프르 전투는 이 맹목적인 전쟁에서도 가장 맹목적인 살육이었다.''' - [[https://ko.wikipedia.org/wiki/A._J._P._%ED%85%8C%EC%9D%BC%EB%9F%AC|A.J.P.테일러]][* 출처: 지도와 사진으로 보는 제1차 세계대전(A.J.P. 테일러 저)] > 쓸데없는 용기와 인명의 낭비("a forlorn expenditure of valour and life without equal in futility") - [[윈스턴 처칠]][* [[https://www.thecanadianencyclopedia.ca/en/article/passchendaele-remembrance-of-things-past-feature|*******]]] 분명 영국군은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최선의 노력을 다하여 목표달성을 이루는 데 성공했다. 피해도 솜 전투와 아라스 전투에서의 엄청난 피해보다 크지 않았다.[* 솜 전투에서 일 평균 2,95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아라스 전투의 경우 일 평균 4,07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러나 파스샹달의 경우 일 평균 2,121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계속되는 공세가 굳이 '''필요'''했던가에 있었다. 처음 세 차례의 공격, 특히 브로드세인더 공격은 독일군에 강력한 타격을 입혔다. 플러머의 밀집된 포대는 10월 4일에 지나치게 전방으로 집결한 독일군 반격 사단들을 습격했고 많은 사상자를 낳게 했다. 특히 제4 근위사단이 큰 타격을 입었다. 그 결과 독일군은 다시 한 번 전선 방어 체계를 다듬기로 결정했다. 브로드세인더 공격 이전에 독일군은 보호 탄막 뒤에서 나타나는 영국군 보병을 타격하기 위해 반격 사단들을 전투 지대에 가깝게 배치했다. 그러나 독일군이 영국군 포대의 한층 더 강하고 깊은 포격에 노출되는 결과만 초래하자 [[에리히 루덴도르프]]는 반대의 명령을 내렸다. 전선은 다시 적은 병력으로 지키고 반격 사단들은 후방 멀리로 내려와 그곳 진지에서 강력한 포격과 탄막으로 계획적인 되치기를 준비할 수 있을 때까지 움직이지 않아야 했다. 진창 위에서 수행한 작전은 본질적으로 마치 협의한 듯이 서로 똑닮았다. 공격군은 엄청난 포격으로 방어군을 기진맥진하게 한 다음 포탄이 떨어진 좁은 지대를 점령한다. 그 다음에는 방어군이 반대 방향에서 잃은 땅을 되찾을 수 있기를 바라며 같은 과정을 되풀이한다. 결정적인 승리가 목적이라면 이는 완전히 쓸데없는 방식이었다. 대전의 기술적인 측면에 집착하는 역사가는 야포 포탄의 [[신관]]이나 [[박격포]] 사거리 발전의 간과된 의미를 언제나 강조할 준비가 되어 있는데, 그 점에서 가장 열성적인 역사가조차도 헤이그가 브로드세인더 이후에 전투를 중단했어야 했다고 인정한다. 헤이그는 강경하게 반대의 결정을 내렸다. 헤이그는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Broodseinde|브로드세인더를 공격]]하기 전에 군 지휘관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적은 비틀거리고 있으며 ...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면 결정적인 결과를 얻을 것이다." 그 직후 로이드 조지가 이프르에서 입은 손실을 보충하기 위해 프랑스로 갈 증원군의 숫자를 은밀히 제한하려 했을 때, 헤이그는 [[참모총장]] 로버트슨에게 이렇게 썼다. >"영국군 홀로 대공세를 수행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 공세를 최대한 강력하게 추진하기 위해서 ... 모든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데에는 이의가 있을 수 없다." 10월 12일 [[뉴질랜드]] 사단과 [[오스트레일리아군]] 제3사단은 이프르 동쪽 해발 45m 고지에 남은 파스샹달의 한 부분에 도달하려 했다. 그곳 독일군의 2차 플랑드르 진지 참호선과 토치카는 영국 원정군과 적군 후방 사이에 남은 마지막 장애물이었다. 헤이그는 10월 9일 종군 기자 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실제로 적군 방어선을 뚫고 있다. 적군은 온몸으로 우리에 맞서고 있다.[* 이날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군은 전면과 측면의 기관총 사격을 '''온몸'''으로 받아 결국 원위치로 퇴각한다. 결국 캐나다 군단이 고지로 가는 수렁과 시내로 둘러싼 좁은 2개의 방죽길을 어떻게든 뚫고 들어가 점령하였다. 캐나다 제3사단과 제4사단의 병사 2명이 빅토리아 크로스는 받은 것은 덤으로 말이다.]" 독일군은 분투하여 제2안잭군단을 격파하고 안잭군단은 3000명의 사상자를 입었다. 제2안잭군단을 헛된 희생으로 내몬 헤이그는 캐나다 군단에 의존했고, 캐나다 군단을 지휘한 장군 [[https://en.wikipedia.org/wiki/Arthur_Currie|아서 커리]] 경은 이프르에서 병력을 잃고 싶지 않아 했으며, 헤이그가 요구한 공격은 1만 6000명의 사상자를 낼 것이라 예상했다.[* 파스샹달 전투의 마지막 달에 커리는 헤이그의 파스샹달 능선을 점령하라는 명령에 단호하게 이렇게 말했다. "자살행위입니다, 이 무의미한 공세에 저는 16,000명의 정예병을 헛되이 쓰지 않을겁니다." 그 말뒤에 아서 커리는 파스샹달 능선을 점령하란 명령을 수행했다.[* [[https://en.wikipedia.org/wiki/Douglas_Haig,_1st_Earl_Haig#1917|******]]]] 자국 정부에 호소할 수 있고 명령을 거부할 수도 있었지만 결국 캐나다 군단은 헤이그의 명령에 따라 전투에 참여했고 제1차 플랑드르 진지를 돌파하여 500야드[* 약 457.2m.]를 전진했고, 그 구간을 방어하던 제11바이에른 사단에 큰 피해를 입혔지만, 아서 커리 경의 예상대로 사상자 1만 5,654명의 피해를 입었다. >"맙소사, 우리가 정말로 병사들을 이런 곳에서 싸우도록 내보냈단 말인가?.("Good God, did we really send men to fight in that?")" - 헤이그의 총참모장(런슬롯 키겔)이 1917년 11월 8일 파스샹달 전역을 방문하면서 남긴 말.[* [[https://www.historiamag.com/the-general-who-wept/|*****]]] 파스샹달 전투는 우리가 알던 참혹한 참호전 방식으로 치뤄진 마지막 전투였다. 당시에는 아무도 이를 알지 못했으며, 병사들을 사지로 내몬 장군들도 최후에 가서 전장을 보고 무언가 잘못된 것을 깨달을 정도였다. 위에 말을 남긴 참모장도 방문 당시 이용한 차가 진창에 갇혀 어렵게 지나가자 눈물을 흘리며 탄식했다. 이때 동행했던 장교가 대답하길 '''위로 올라가면 이보다 더합니다.'''라고 응답했다. 군수뇌부도 전장의 참혹함에 눈물을 쏟고 있을때 오직 헤이그만 낙담하지 않고 봄에 있을 새로운 작전을 구상하고 있었다. 한편 독일군의 경우 초반의 견고한 플랑드르 전선의 방어가 연합군의 유기적인 분대공격으로 무력화되고 공세 중 파스샹달 지역 최대의 요충지중 하나이자 격전지인 겔루벨 고지가 결국 연합군에게 함락되자 전략을 수정한다. 앞으로 있을 1918년 봄, 독일군의 대공세(미하엘 공세)를 위해 철저한 수성전에서 파스샹달 일대의 영국군의 피해를 '''최대한 늘리자'''는 계획이었다. 결국 헤이그의 강한 공세정신과 독일군의 계획이 맞물려 수많은 인명이 파스샹달에서 사라져 갔다.[* 파스샹달 전투 후 헤이그는 33만 4000명의 병력이 필요하다며 로이드 조지에게 건의했지만 로이드 조지는 군인뽑는 기계도 아닐 뿐더러 총사령관 더글라스 헤이그와 참모총장 로버트슨의 공세--지향주의--를 자제시킬 필요를 느꼈다. 이는 1918년 3월까지 서부전선의 영국군에 18만 4000명 밖에 증원이 안됐고 독일군이 춘계공세 초기에 놀라운 진격속도를 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물론 로이드 조지에게 책임을 묻기도 뭐한 것이 기존의 서부전선의 예비대로 '''최소 18일은 버틸 수 있다.'''고 헤이그 본인이 주장--무리수--했으며, 그외 병력배치는 로버트슨과 국방성이 주도했다.][* 또한 프랑스군의 요청으로 서부지역의 영국군 담당지역을 확대(거의 프랑스 전지역을 수비하는 프랑스군에 비해 영국군의 담당지역은 비교적 좁기도 했다)하여 영국군의 담당지역은 생캉탱(Saint-Quentin)에서 32Km가량 남쪽으로 떨어진 바히시스(Barisis)까지 연장되었는데 이 지역까지 담당하는 고프의 제5군은 총 67.5Km에 이르는 지역을 12개 보병사단과 3개 기병사단으로 수비해야 했다. 반면에 옆에 위치한 제3군의 경우 45Km의 구간을 14개의 사단이 수비하고 있었다. 추가적으로 프랑스군에게서 넘겨받은 방어진지는 매우 엉성했고, 파스샹달에서 그 효율성을 입증한 유기적 종심 방어의 개념을 이해한 지휘관은 극히 일부였다.][* 춘계 공세 당시 가장 크게 뚫린 곳이 고프의 제5군과 그 주변 부대였다. 그리고 고프는 기존에 그를 눈엣가시로 여기던 로이드 조지에게 찍혀서 해임되었는데 그가 파스샹달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고도 멀쩡했던 것은 그가 로버트슨의 파벌이기 때문이었다. [[http://panzerbear.blogspot.kr/2007/04/hubert-gough.html?m=1|***]]]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